[책] 첩이 부인만 못하리까...'격정의 문장들'

시사 앤 뉴스 승인 2022.11.18 07:47 의견 0
격정의 문장들 (사진=푸른역사 제공)

조선시대 정조 대 국왕에게 상언·격쟁한 사례들을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여성들이 제기한 상언·격쟁이 405건이나 포함되어 있다.

정조 재위 기간인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약 25년 동안 405건이면 한 해에 16건 정도의 청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는 전체 상언·격쟁의 10.4% 정도며 이 중 평민층 부녀자가 올린 것이 사족 부녀자가 올린 것의 3배 정도가 된다.

여성이 상언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할 때다. 여성들이 올린 상언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올린 경우도 많고 더러 딸로서 한 경우도 발견된다.

양반 여성들이 올린 상언 가운데는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로 죽은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올린 것들도 많다

시집 남자 어른들과 힘을 겨루고 시어머니에게 원정을 하여 승패를 가르고자 하면서 써 보낸 글에서 이씨 부인은 내내 시집과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격한 감정과 원색적인 표현으로 시집을 공격한다.

이씨 부인이 선택한 방식은 유교적 여성 규범의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바느질은 배우지 않았다고 하고 시집에서 나가 친정으로 갔다. 참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하지도 않았다.

분노와 미움, 원망과 서운함, 슬픔과 억울함, 자신감과 자기비하 같은 감정들이 솔직하고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욕도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멈출 수 없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선 시대 상언과 근대 계몽기 여성 독자들이 쓴 독자 투고를 톺아본 책 '격정의 문장들'(푸른역사)에도 그 같은 충격을 주는 이야기들이 담겼다.

조선 시대 여성생활, 특히 여성의 글과 글쓰기에 관해 관심을 기울여 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 여성들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열망과 혜안을 보여준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법을 어기고 편법을 행했다고 당당하면서도 간절하게 호소한 양반 부인의 상언, 시집을 향해 온몸을 다해 항변한 원정은 유교 가부장제 사회의 강요된 부덕을 지켜야 했던 여성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여학교 설립을 호소하며 대궐 앞에 엎드린 부인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 신문 독자, '첩이 부인만 못하리까, 슬프다 대한의 천첩된 자들아'라고 외친 첩들의 목소리도 묻혀 있던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시사앤뉴스 김한규 기자 www.cat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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